어떤 책은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그 가치를 말할 수 없다. 읽는 동안 마음속에 남는 감정과,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도록 따라다니는 생각들이 그 책의 진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로맹 가리는 프랑스 문학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공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유일한 작가다. 공쿠르 상은 한 작가에게 평생 한 번만 주어지는 상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은 뒤,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해 다시 공쿠르 상을 받았다.
1976년에 출간된 문학사상사판 『자기 앞의 생』에는 작가 소개 대신 이런 문장이 실려 있다. “출판사에서도 원작자가 누구인지 몰라 광고를 통해 작자를 찾기까지 한 ’75 공쿠르 상 수상자 에밀 아자르! 그는 누구인가? 정말 그가 썼는가? 왜 상을 거부했나? 전 세계에 파문을 던진 아자르의 충격!” 당시 문단이 얼마나 큰 혼란과 호기심에 휩싸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는 1980년 로맹 가리가 권총으로 자살한 뒤 남긴 유서를 통해 비로소 밝혀졌다.
하지만 『자기 앞의 생』이 지금까지도 읽히는 이유는 이런 문학사적 사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소설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결국 사람과 사랑, 그리고 생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모모는 어린아이지만 이미 세상의 거친 면을 너무 일찍 마주한 아이이다. 그는 유대인 노파 로자 아줌마가 운영하는 보호소에서 자란다. 보호소는 낡은 건물 7층에 있고, 그 건물에는 사회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이 각자의 사연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자신을 돌봐주는 대가로 매달 우편환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순간 모모의 마음속에서 어떤 것이 무너진다. 로자 아줌마가 단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돌봐주는 것이라고 믿었던 여섯 살 아이에게 그 사실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믿었던 모모는 그날 밤 밤이 새도록 울었다. 여섯 살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슬픔이었을 것이다.
모모의 삶은 지독할 만큼 가혹하다. 그러나 그 가혹함 속에서도 모모의 시선은 놀라울 만큼 순수하다. 그래서 그 이야기가 더욱 깊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모모는 엄마에 대한 궁금증이 커질수록 복통과 발작을 일으킨다.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이 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파도 엄마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을 읽으며 모모의 마음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된다.
주인공 모모가 비록 어리지만 사랑에 민감하고,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은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난다. 어느 날 모모는 자신이 키우던 푸들 ‘쉬페르’를 부유한 여자에게 팔아버린다. 돈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쉬페르가 자신과 사는 것보다 그 여자와 사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모는 가장 의지하던 존재를 부유한 여자에게 팔고 오백 프랑을 받았고, 그 돈을 하수구에 던져버린다. 그리고는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엉엉 울어버린다. 나는 당장이라도 모모를 안아주고 싶었다. 내가 읽는 모든 문장이 마치 하나의 말을 반복해서 외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모모의 하루하루는 그 자체로 생의 슬픔이라고.
힘든 환경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모모도 또래보다 일찍 세상을 짐작한다. 동시에 어린아이의 순수함도 간직하고 있다. 그 간극 안에서 모모는 세상의 부조화를 또렷하게 발견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의 슬픔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모모가 바라는 것이 병원에서 카츠 선생님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 매일 밤 아이들을 돌봐주는 암사자를 꿈에서 만나는 것, 로자 아줌마와 헤어지지 않는 것,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한 곳에 가보는 것 등의 너무 소박한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더 없는 슬픔과 애잔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 작은 소망조차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삶이 바로 모모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힘든 생활 속에서 모모를 버티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산에게 이름을 붙이고, 개를 사랑하고, 자신을 돌봐준 어른들을 향해 연민을 느끼는 마음. 어쩌면 그런 작은 마음들이 모모를 버티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내 아이에게 그런 마음이 자라날 수 있도록 키웠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어쩌면 모모는 그 고된 삶 속에서 우리가 잊고 지내는 더 값진 어떤 것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소설이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는 점점 늙음과 죽음의 문제로 향한다. 늙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바라보며 모모는 말한다. 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 사람들이 안락사시켰을 것이라고. 이 문장은 단순히 충격적인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순수한 애정에서 출발한 ‘인간의 존엄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문장이다. 사람은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가. 왜 동물에게 허용되는 선택이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의 생이 얼마나 잔인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숙명처럼 내뱉으며 마무리된다. 이 문장은 단순한 감상적인 문장이 아니다. 모모의 삶을 따라 끝까지 걸어온 독자가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결론이다. 그 순간, 이 소설이 적나라하고, 때로는 낯뜨겁고, 매우 슬픈 이야기임에도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계속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